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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제 80 호

특집
미디어운동, 10년을 논하다 : (1) 독립다큐멘터리 운동 진영

 

[ACT! 80호 2012.08.30 기획대담] 

미디어운동, 10년을 논하다 : (1) 독립다큐멘터리 운동 진영 

- 대담: 김동원 <송환> 감독 + 홍효은 <아무도 꾸지 않은 꿈> 감독 -

기록 및 정리: 스이 (ACT! 편집위원회)

[편집자 주] 2012년 초, ACT! 편집위원회(이하 편집위)는 [ACT!] 발간 10주년을 준비하며 미디어운동의 지난 10년을 정리해보자는 야심찬 계획을 세운다. (그렇지만 이내, 내부의 역량만으로는 불가능한 기획임을 자각한 편집위는 각 분야의 원로 활동가와 신진 활동가 간 대담을 통해 개인사와 어우러진 운동사를 정리해 보는 것으로 방향을 가다듬는다.) 의욕 넘치는 기획대담 연재의 첫 주자는 독립다큐멘터리 운동 진영으로 선정되었다. 한국 독립다큐멘터리의 대부 격인 김동원 감독님과 올해 인디다큐페스티발 개막작 <아무도 꾸지 않은 꿈>의 홍효은 감독님을 모시기 위한 물밑 작업이 3월 초부터 추진되었고, 여러 차례 일정이 미뤄진 끝에 7월이 되어서야 극적으로 대담이 성사되었다. 다음은 7월 어느 날 상수동 ㅅ카페에서 이루어진 대담의 주요 내용이다.

 
군불 때기 - 다큐를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김: 홍 감독은 원래 극영화를 만들려고 구미에 들어갔다가 다큐로 정리하는 게 좋겠다 싶어서 (“아무도 꾸지 않은 꿈”을) 만들게 되었다고 들었는데 아닌가?
 
홍: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데요, 제가 울산 현대차 노동조합에서 1년 동안 일을 했거든요. 대학 졸업하고. 그 때 시나리오를 쓰려고 했어요. 근데 안 써지더라고요. 노조에 있으니까 뭔가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막상 쓰려고 하니까 남의 이야기를 아는 척 하면서 쓰는 것 같고. 그런 기분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공장에 들어가 있어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죠. 
  처음에는, 아는 언니가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오라고 해서 갔다가, 시나리오를 쓰려고 갔다기보다 그냥 이상한 계기로 그 곳에서 일하게 됐어요. 면접을 봤는데 합격을 했고, 그 당시에 서울에서 무슨 회사를 다니고 있었는데 그 곳에서 너무 짜증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냥 끌리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해서 가게 되었죠. 다큐 찍을 생각은 없었긴 했어요. 
 
김: 원래 극영화에 자기 지향이 있었던 거지? (홍:네) 그런 걸 보면 나와 비슷했던 것 같네. 나도 다큐를 할 생각은 전혀 없이 상계동에 들어갔으니까. 뭐 거기서 극영화를 찍을 생각은 아니었지만은. 만약 내가 다큐를 좀 알고 찍을 목적으로 상계동에 들어갔으면 3년 동안 못 있었지. (웃음) 그냥 그 때는 다큐 할 생각도 없었고, 다큐가 뭔지도 몰랐고, 다만 폭로할 영상이 필요하니까 무조건 찍고 급하게 요새 말하는 UCC(유씨씨)처럼 뿌리고, 그런 것들을 모으면 뭔가 되겠다 싶어서 만들게 된 거지. 
 
홍: 그러면 처음에는 그냥 운동적 측면에서?
 
김: 아니, 운동도 아니었고, 누군가 부탁해서. 당시 강제 철거가 보편적일 때니까 강제 철거 당한 모습, 깨진 그릇들, 장독들, 장롱 등을 나중에 재판할 때 자료로 쓰겠다고 누군가 하루만 찍어달라고 해서 들어간 거지.
 
홍: 그러다 3년 계시게 된 거군요 (웃음) 그 당시에는 그렇게 속보처럼 찍으면 어떤 식으로 공개가 되었나요?
 
김: 상계동은 고대 학생들이 많이 왔고, 또 천주교 쪽에서 많이 왔는데. 이쪽에서는 막 편집해서 5개 정도 복사본을 만들어서 주는 거지. 그럼 그 아래서 복사해서 전해졌지. (홍: 비디오테이프?) 그렇지. 그 때는 비디오테이프밖에 없었지. 당시 컴퓨터가 있긴 있었겠지만, 내가 몰랐고. (웃음) 
  다큐 한다는 자의식이 없었으니까, 다큐 제작 과정에서 힘든 것도 몰랐어. 예를 들어서 내가 알았다면 아마 철거민들을 찍는 것부터 나에게 심리적인 부담감이 되었을 거야. 근데 그 때는 부탁받아서 찍은 거니까, 내가 작품하려는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냥 찍었던 거지. 비교적 최근의 일인데, 2000년 들어 사람 찍는 게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이해를 못했어. (웃음) 지금은 그런 걸 이제 잘 이해하게 되었지만. 처음에 뭣 모르고 할 때는 딜레마를 잘 모르지. 두 번째부터는 그런 게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런데 상계동에서부터 빈민 운동 활동가 분들을 만나게 되고 다른 지역 철거촌들도 의무감으로 갔었기 때문에, 그 때도 다큐 찍는 게 힘든지 몰랐어. (웃음) 그러면서 내가 활동가인지 다큐 제작자인지 하는 자기 질문들을 던지게 되었지.  
 
스이: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끼어들며) 홍 감독님은 공장에서 일하시면서 다큐멘터리 제작자로서의 정체성이 생기신 건가요?
 
김동원 <송환> 감독
▲ 김동원 <송환> 감독
 
홍: 거의 안 생겼던 것 같아요.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만 커졌고. 찍긴 찍었는데 영화로 완성될지 확신도 별로 없었어요, 그 당시에는. 그리고 찍히는 사람들도 영화로 만들어질 거라는 것을 믿지 않았어요. 네가 뭘 찍냐, 이런 분위기였고 (웃음) 인디다큐 페스티발에서 상영할 때 보러오라고 했는데 안 믿으면서 일단 증거로 DVD를 보내봐라, 이런 식이었어요. (웃음) 
 
김: 촬영할 때도, 다큐멘터리를 만들 거라는 확신 같은 것은 없었지?
 
홍: 만들고는 싶었는데, 제가 울산에 있을 때 "현대 미포 조선"이라고 굴뚝 위에 사람이 올라가서 투쟁하는 과정을 반년 정도 찍었어요. 그걸 편집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긴 시간을 편집한다는 것 자체가. 제가 노동조합에 있으면서 10분, 20분 정도의 교육물 영상은 많이 만들었는데 이게 장편으로 될 거라는 확신은 없었어요.
 
김: 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기록 작업은 상당히 경험이 많은 편이네?
 
홍: 2년 정도 했던 거죠.
 
김: 난 극영화를 욕망하다가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된 전형적인 사례인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구만. (웃음) 미포조선 노조에 있었던 건가?
 
홍: 아니요, 현대 자동차 노조에서 일했어요. 그 때 연대를 많이 했는데, 연대했던 현장 중에 미포조선이 있었던 거죠. 나중에 40분 쯤 길이의 영상으로 만들어서 노동영화제에서 상영했는데 너무 싫은 거예요. 그 때까지만 해도 다큐멘터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김: 그 때가 몇 년도 쯤이지?
 
홍: 음…200…9년도. 
 
김: 영화학과 출신이라고 하지 않았나? (홍: 네 맞아요) 영화학과 출신이 이상하게 됐는데? (웃음)
 
 

<아무도 꾸지 않은 꿈>에 대하여

 
김: 근데 찍은 걸 보면 활동가가 찍은 듯한, 약간의 선동성이나 노동 문제를 깊이 파헤쳤다, 이런 느낌보다는 차라리 헌팅할 때 사람들 기본적인 스케치, 혹은 학자의 구술사 인터뷰 같은 느낌이 들거든? 영화적으로 스타일리시한 그런 느낌을 일부러 배제한 듯 한 느낌이었어. 중간에 시를 삽입하기도 했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뭐랄까… 되게 딱딱한 느낌?  
 
홍효은 <아무도 꾸지 않은 꿈> 감독
▲ 홍효은 <아무도 꾸지 않은 꿈> 감독
 
 
 
홍: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웃음)
 
김: 보통 다큐를 할 때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을 테고, 보통은 인터뷰가 중심인 경우도 여러 가지 다른 요소들을 가져올 수 있었을 텐데. 인서트들도 그것보다는 훨씬 풍부하게 쓸 수도 있었을 테고, 떡볶이를 먹으면서 수다를 떤다든지 하는 일상의 풍경들을 찾으려고 노력을 했을 것 같아, 나라면. 일부러 그런 것들을 차단한 느낌이 들었는데, 몰라서 그랬던 거야 아니면 일부러 그랬던 거야? (웃음) 결국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나름대로의 스타일이 되었지만.
 
홍: 사실 그런 소스가 없지는 않았는데, 나중에 다 뺐어요. 일하면서 찍느라 시간이 없어서 많이 찍지는 못했지만. 한 명당 사생활을 찍기는 찍었어요. 인간적인 냄새가 나올 만한 분량으로 편집을 안했던 거죠. 같이 돌아다니거나 네일샵에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그런 장면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넣지 않았죠. 인터뷰는 거리가 가까운 촬영 방식인데, 보는 사람이 너무 가까워지지 않았으면 생각이 있었어요. 떡볶이 먹으면서 농담하는,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면 보는 사람들이 그 사람을 잘 안다고 느끼잖아요? 친근하게 느끼면서, 그런 점들이 싫더라고요. 
 
김: 안다고 느끼기 보다는, 감정적인 접점을 만들기 위해서 보통 그런 장면을 넣는 거지. 그 인물과 동화되어야만 그 소리가 잘 들리고, 약간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되니까. 결과적으로는 아주 냉정한 거리감을 유지한 것처럼 보이고, 테이크도 굉장히 느려졌고, 호흡이 길어졌고. 사실 그런 것들은 말하자면 내공이 있어야 하거든. (웃음) 내공 없이 표현이 되면.. 그런데 그 내공이 영화적 내공인지 노동현실에 대한 자신의 경험이 바탕이 된 내공인지 잘 모르겠어. 그 전에 현대에서 일하고 그랬던 것을 보면 활동가로서의 정체성도 좀 있을 것 같은데.
 
홍: 네. 울산 가서 그렇게 됐어요. 인생이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웃음)
 
 

정체성 찾기 - 독립영화와 운동, 극영화와 다큐의 경계 위에서

 
김: 지금은 어때? 그 때 울산에서의 삶과 비교해보면.
 
홍: 제가 대학 다닐 때는 한나라당 지지자였어요. (웃음) 저의 논리가 굉장히 확고했어요. 맨날 노빠들이랑 싸웠거든요. 그러다가 울산에 우연한 계기로 내려가서, 처음에는 모두 빨갱이처럼 보였고…. (웃음) 그 때는 홈에버 투쟁할 때였는데 그걸 보면서 조금씩 돌아서게 되었죠.
 
김: 울산에 처음 내려간 것은 단순히 직업 때문에 간 거야?
 
홍: 대학 다닐 때 영화과니까 영화 만들려면 제작비가 필요해서 공장에서 두 달 동안 일을 했는데 그게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충격을 경험했던 시간이었어요. 그 경험을 바탕으로 졸업 작품을 만들고 있는데, 마침 선배가 노조에 들어오겠냐는 제안을 했었죠. 그 때는 내부를 깊이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이 컸어요. 그래서 1년 만 있겠다, 했는데 가서 모든 게 변했죠. (웃음)
 
김: 어떻게 보면 (홍 감독은) 기복이 매우 심한 20대를 보낸 것 같은데, 인디다큐 페스티발 상영도 하면서 다른 방향으로 선회되고 있는 시점인 것 같아. 활동가, 영화감독, 다큐 감독 혹은 극영화 감독, 그 다양한 가능성 중에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해?
 
홍: 예전에도 그런 질문을 들었는데, 그 구분이 왜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구분지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고… 
 
김: 그럼 둘 다라고 생각하는 건가?
 
홍: 현장에 있을 때는 활동가라고 생각하지만 다큐를 만들고 상영하는 현장에서는 다큐 감독이라고 불리지 않을까…
 
김: 물론 그렇긴 하지만, 궁극적인 지향점은 생각해 보게 되지 않나?
 
홍: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다큐와 극영화를 둘 다 하고 싶어요.
 
김: 나 같은 경우는 그게 계속 문제가 됐거든. 우리 동네에서 철거 들어오고 그럴 때 카메라를 들어야 하는지 철거 싸움을 해야 하는지. 또 독립영화 운동이 과연 영화 쪽에 가까운 건지 운동에 가까운지… 사람마다 다르고 다 존중되어야 하지만, 최소한 나에게는, 나도 양립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물론 있지만, 둘을 구분하는 게 우습기도 하고, 둘 중 하나도 포기하지 말자는 게 내 대답이었지만, 실제로는 시대에 따라 나에게 요구되는 것이 다르니까.
  독립 영화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웃기지만, 사실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기도 하니까. 나와 출발 지점이 비슷하면서도 다른 (웃음) 홍 감독의 생각이 궁금했지. 
  예를 들어, 변영주 감독은 어떻게 보면 운동권이었고, 일종의 수단으로서 다큐멘터리를 시작했던 케이스지. 반면, 나는 운동권이 아니었고 다큐멘터리에 대한 목적의식 같은 것도 없었어. 그렇지만 변영주 감독은 '언제나 영화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영화는 욕망이다', 라는 선언을 하면서 극영화로 넘어간 거거든. 그렇게 복잡한 것들이 내 마음 안에 다 있는데, 홍 감독 안에는 뭐가 있는지. (웃음)
 
홍: 저는 정리가 필요한 시기인 것 같아요. 누워 있을 때면 뭔가 만들고 싶은 게 계속 떠오르는데, 인디다큐 때도 관객과의 대화 할 때마다 다음 작품 질문을 받잖아요. 그런데 대답은 늘 달라요. (웃음) 그런 때인 것 같아요. 
 
김: 내가 보기에 홍 감독은 신진 중에서도 좀 독특한 편인 것 같아. (웃음) 연분홍치마는… 지금 신진은 지났지만, (여성영상집단) 반이다…도 지금 신진은 아닌가? (웃음) 그러니까 뭔가 운동과 영화에 대해 꾸준히 고민을 하면서 인디다큐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안으로 들어온 경우가 아니란 말이지. 어떻게 보면 툭 튀어나온 경우라서. 그 전에 주변에서 다큐 하는 사람들이 있었거나, 다큐 영화제에 가 보고 그랬나? 거의 없었을 것 같은데.
 
홍: 거의 없었죠. 그런데 현대자동차 있을 때 노동 관련 다큐는 굉장히 많이 봤거든요. 노뉴단 영상도 봤어요. 그렇지만 현실과는 엄청난 괴리를 느꼈는데, 제가 있던 울산은 굉장히 고립된 공간이었던 거죠. 내가 만난 현실은 100미터 굴뚝에 올라가 있거나 3층 작업장에서 목에 줄을 매고 뛰어 내리고 있는데… 그걸 영상으로 속보를 만들었거든요. 나중에 집회 있을 때 친구들이 내려와서 그 영상을 같이 봤는데, 노빠 정도 되는 친구들이었는데, 80년대 영상 같다고 너무 싫어하더라고요. 그런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어요. 친구들한테서, 너가 만든 영상은 이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들을. 울산 운동권 안에서만 이해되는 영상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줄 수 있는 영상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큐를 만드는 동력 - 무엇으로, 어떻게 계속 다큐를 만들 것인가

 
 
홍: '미포 조선' 영상도 그런 식으로 정리를 하다가 못했죠. 제가 그 운동에 정말 깊이 개입하고 있었거든요. 사실 오늘 그걸 여쭤보고 싶었는데, 마음이 정리가 되지 않았어요. 사측과 합의를 하고 내려왔는데 결국 하나도 지켜지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패배한 투쟁이 되버렸어요. 그 분노가 너무 심해서 매일 울고 그랬거든요. 서울 와서 친구들이 정신과 치료를 받아봐라, 그럴 정도로. 밤에 잠을 자지 못할 정도였어요. 그 영상을 편집을 하면서도 그 분노가 감당이 되지 않아서 결국 순서적으로 나열만 하고 끝났어요. 편집을 다시 하려고 했는데 더 할 용기가 나지 않더라고요. 상계동 올림픽 편집하실 때는 어떠셨는지 궁금했어요. 
 
김: 나는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던 것 같아. 일단 상계동 올림픽도 사실은 폭로용으로 만든 거라 빨리 만들어서 뿌려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고. 부천에서 철거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명동과 상계동에서 있었던 이야기도 해야 하고. 그 전에 편집본을 해 둔 게 있어서 어렵지 않게 했어. 부천에서 고등학생 얻어맞을 때 그거 편집할 때는 조금 힘들었지만, 다른 거는 무조건 빨리 편집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에 어렵지는 않았던 것 같아. (잠시 생각하다가) 그 분노라는 게, 분노에 자기가 지면 아무 것도 못하지. 
 
홍: 저는 진 거죠. (웃음)
 
김: 그런데 분노가 또 에너지가 될 수 있거든. 그 분노를 가지고 작업을 해야 하는 것 같애. 모든 다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비판적인 메시지를 갖고 있을 때 비판의 대상에 대한 분노가 꼭 필요하지. 거기에 여유, 혹은 마이클 무어 같은 풍자, 반어법 같은, 분노를 다 없애는 게 아니라 누르면서 다른 표현 방법을 쓴다면, 민짜로 나열된 것이 아니라 스토리텔링을 한다든가, 그렇다면 보는 사람 입장에서도 생짜 느낌이 약간 순화되겠지.
  만약 미포 이야기를 다시 할 생각이 있다면, 본인 이야기부터 시작해 봐도 재미있지 않을까? 한나라당 지지자였고 (웃음) 그런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지금 노조에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 푸른영상의 한 친구가 울산을 다시 찍고 있는데, 노동 운동 전반에 대해서 한진의 희망버스부터 출발했다가 노동자들, 특히 중년 이상의 노동자들이 과연 지난 20여년의 노동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런 것들을 작업하고 있는데. 운동이라든가 사회 변화를 약간 떨어진 시각으로부터 시작할 수도 있을 테고, 본인의 자서전적인 느낌이 강한 작품으로 만들 수도 있을 테고. 너무 센 장면들은 장치를 사용해서 중화시킬 필요가 있긴 하겠지. 
 
진지하게 대담 중인 감독님들
▲ 진지하게 대담 중인 감독님들
 
홍: '미포' 편집하기 전에 "송환"을 다시 봤거든요. 그런 걸 만들고 싶었는데… 대학교 때 처음 본 다큐였는데, 당시 한나라당 지지자였음에도 부대끼지 않았고 되게 좋았거든요. 그렇게 담담하면서도 강요하지 않는 그런 걸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안 되더라고요. (웃음) 많이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그 때도 자전적인 내레이션을 좀 했지만 분노가 너무 넘치고 담담해지지 않았거든요. 결국 내레이션을 다 빼게 되었죠. 이번에도 "경계도시 2"를 보았는데, 나이가 들고 내공이 좀 쌓이면 "송환"이나 "경계도시 2" 같은 작품을 해보고 싶어요. 그게 안 된 상태에서 내레이션을 쓰면 우스운 것 같아요, 제 입장에서는. 
 
김: 성찰적인 자세가 사실 모든 다큐를 할 때 필요하지. 센 작품에서는 특히나 조금 더 주의를 해야 하지만. 사건에 대한 시간적, 심리적 거리가 약간 생기면, 그걸 재정리해서 볼 수 있게 되고. 어떻게 보면 현대를 보는 시각도 굉장히 여러 가지잖아. 노동이나 노동자의 현실이란 것도 굉장히 다양한 결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매우 다른 이야기가 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다양한 면, 다른 결들의 이야기가 들어갈 수 있는 층이 여러 개 있는 작품을 한다면, 입체적인 작품을 만들 수 있다면 괜찮을 것 같아. 너무 한 방향으로만 몰아가다 보면 관객들도 지치고. 
  내가 요새 생각하는 것은, 사실 원래 그런 거지만, 참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고 어떤 단순한 사실도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서 뭘 이야기하더라도 조심스럽게 이야기 해야겠다,는 것이지. 옛날처럼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없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마이클 무어처럼 '아님 말고', 식으로 나가든가 (모두 웃음) 
  자기 캐릭터도 중요한 것 같아. 윤성호나 최진성처럼 치고 빠지는 방법으로 갈 수도 있고. 그게 표현전략일 수도 있고 자기 캐릭터일 수도 있는데, 자기에게 맞는 화법을 찾을 수 있다면 좀 덜 부대끼겠지. 
  (잠시 생각하다가) 본인이 여러 가지 정체성이 있겠지만, 다큐가 할 만하다, 혹은 나도 다큐 판에 들어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나?
 
홍: 요즘에 좀 하고 있어요. (웃음) 제가 몰랐던 세계가 있는 것 같아요.
 
김: 신다모(신진다큐모임)나 이런 곳에 나가나?
 
홍: 네, 지금 신다모 활동 하고 있어요.
 
김: 요새 자발적인 움직임, 모임들이 기대 이상으로 활발한 것 같아. 왜 그런지 사실 나는 궁금해. 참 판이 잘 벌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홍: 에너지가 넘치는 것 같아요, 신다모를 보면 (웃음)
 
김: 형편이 좀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다큐멘터리를 하겠다는 것은 사실 아직도 맨땅에 헤딩하기, 같은 그런 게 있잖아. 하고 싶어 하지만 겁내 하는 친구들이 꽤 많거든. 미디액트도 수강생들이 그럴 거야. 사회적으로 유익하고, 창의적이고 공공적이기도 한, 다큐멘터리는 그런 면에서 장점이 많지만 한 편으로는 내가 과연 그 일을 지속적으로 해나갈 수 있을까, 학생들을 보면 그런 불안을 특히 많이 느끼는 것 같아. 그러면서 사람을 만나는 것에 대해서 부담을 느끼는 거지. 내가 무슨 자격으로 사람을 만나는지, 장래에 대한 불안감 그런 것들 때문에 다큐라는 속성이 사람을 착취하는 거다, 만나는 사람의 이야기를 훔치는 거다, 이런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활발하다는 것은..(웃음)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걸까.
 
홍: 글쎄요. (웃음) 신다모를 보면, 사실 저 같은 경우도 그렇지만, 한 작품을 만들고 나면 사실 되게 막막하잖아요. 또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고, 지금도 그렇기는 한데. 나 혼자 있을 때는 굉장히 힘든데, 그런 사람들이 함께 있으니까 그것 자체로 힘이 되는 것 같아요. 처음에 신다모는 제안서 받을 때 '끈 떨어진 사람들의 모임' 이라고 했어요. (웃음) 다른 사람들은 작품을 만드는데 나만 혼자 굉장히 고립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여러 사람이 모이니까 확실히 더 나은 것 같아요. 신다모 사람들이 계속 작품을 만들고 있는 것을 보면, '아 나도 다시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서 다큐를 만들기 위해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가, 극복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벼워지는 마음이 들어요. 왜냐하면 주변에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작품을 만들고 작품이 나오면서 서로 그런 에너지를 주고받게 되니까요. 이번에 저도 신다모에서 다큐 뜯어먹기 모임을 했는데, 엄청 뜯어 먹혔어요. (웃음) 
 
 
진지한 대담이 50여 분에 걸쳐 오가면서, 두 감독의 커피잔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상수동 ㅅ 까페의 친절한 홍 사장님이 커피 리필을 해주셨고, 두 감독은 잠시 숨을 돌렸다.  
 
 
홍: 감독님은 상계동 올림픽 이후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다큐 작업을 해오셨는데, 어떤 동력이 있었는지 궁금해요.
 
김: 그런 질문 많이 받지만, 나도 잘 모르겠어. 내가 게을러서 (웃음) 다른 재주가 없어서.. 이것 말고 뭐 하겠어.(웃음) 그게 제일 큰 것 같고. 그리고 그 때는 사실 극영화를 하려고 했었어. 스크린 쿼터 투쟁 때문에 영화하는 사람들이 자주 모였을 때고 그 때 상계동 올림픽 만들었던 건데, 사람들이 그걸 보고 '너 다큐에 소질 있는 것 같다', 하면서 '영화 하는 사람들 많으니 너 하나쯤은 다큐해도 되지 않냐', 고 해서 (웃음) 자의반 타의반으로 하게 되었지. 
  당시에는 사실 다큐의 본질을 잘 몰랐고, TV에서 하는 피디수첩 정도로만 머릿속에 입력이 되어 있었어. 그러다가 야마가타 영화제에 가서 보니 정말 여러 가지 다큐멘터리가 있더라고. 다큐에 대한 내 생각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이거 할 만 하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거야. 평생을 걸고 할 만하다, 는 생각을 그 때 하게 된 거지. 
  그리고 내가 상계동에서 만난 사람 중에 내가 보기에 정말 존경스럽고 재미있는 사람들이 되게 많아. 현장에서 그런 사람들 많이 만나야 되거든. 그리고 그 때는 철거가 한창일 때니까 돌아다닐 철거촌도 한두 군데가 아니니까 잘 팔렸지, 여기저기서. (웃음) 노동운동 쪽에는 노동자뉴스제작단이나 서울영상집단처럼 작업하고 있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빈민운동 쪽에는 사람이 없어서 나라도 해야겠다 싶었지. 
  그렇게 열심히 쫓아다니다 보니 도와주는 사람도 생긴 것 같아. 천주교 쪽에서 100만 원 짜리 교육영상물을 의뢰한다든가, <행당동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 자금을 다 댄 거였거든. 큰돈은 아니었지만, 그런 것들 때문에 작업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거고. 나중에 보니까 다른 할 일이 없어지게 되었어. (웃음) 근데 지금도 '이거 꼭 해야 하는데', 싶은 프로젝트는 되게 많지. 내가 게을러서 못하는 거지. 요구 받는 것도 많고. 
  신다모도 그렇지만, 운동 전반이 서로를 속고 속이면서 그렇게 가는 것 같아. (웃음). 독립 영화도 그런 것 같고. 사실 영화하는 사람들 대단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빈민운동 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단한 사람들이 많거든. 자기 일생만 거는 게 아니라 자기를 완전히 내어놓는, 어떻게 보면 거의 종교적이기도 한, 인간적인 의리- 아 저 사람은 배신할 수 없어- 이런 마음이 생기는 사람들이 있어. 다큐를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삶의 태도에서 내가 변하면 안 되는 구나, 그 사람을 생각하면 내가 부끄러워지는 그런 사람들 말이지.  
  다큐 하면서, 모든 다큐가 그렇지는 않지만, 소수자들의 편에 선 다큐를 할 때 느끼는 부담감이 결국은 계급적인 차이에서 오는 것이거든. 다큐를 찍는 상대와 나의 계급 차이. 그 차이를 극복할 자신이 없는, 결국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 없음이 자질론으로 이어지는 거지. 앞으로 어떻게 살겠다는 결심이 안 되어 있는 상태에서 힘든 이야기를 내가 할 만한 자격이 있을까, 이런 거에 대한 불안감 등을 생각하기 싫으니까 난 못해, 그렇게 되는 것 같아. 다큐에서 특히 그런 윤리적인 질문들이 많이 제기되지만, 내가 그런 질문들로부터 떳떳할 수 있다고 생각되면 사실 다큐 찍는 게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야. 멋모를 때는 그냥 하다가도, 내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으면 결국은 찍을 수 있게 되는 것 같아. 실제로 그런 거리가 완전히 극복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느낌이 전달은 되는 거지. 
 
홍: 내가 누구냐, 에 대한 생각을 정말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찍을 때보다는 편집할 때 특히 더. 이번에 "아무도 꾸지 않은 꿈"을 촬영할 때는 나 역시 같이 출연해서 함께 고발하려고 했었거든요. 거의 만담식으로 저도 정말 말을 많이 했어요. 말도 안 되는 현실을 고발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상대가 2시간 이야기하면 나는 1시간 이야기하는 식이었어요. 그런데 서울에 올라와서 편집을 하다 보니 영상 안에서의 나와 지금의 내가 너무 달라서 그런 지점들이 힘들어지더라고요.  
 
김: 그렇지. 나도 요새 힘들어.(웃음) 학교에 있으니까. 옛날에는 그런 걸 전혀 문제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그렇지만 결국 내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느냐, 그것이 궁극적인 나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거든. 내가 잠시 딴 짓을 하거나 쉬거나 하더라도 내가 끝끝내 배신을 하지 않을 수 있다, 고 생각되면 갈 수 있는 거야. 그런 의미에서 성찰이 중요한 거지. 물론 다큐멘터리 자체에 대한 성찰도 필요하지만, 결국은 자기 인생관의 문제이지. 
 
 

사적인 궁금증들

 
홍: 다큐를 하지 않았으면 뭘 하셨을 것 같으세요?
 
김: 영화를 만들었을 것 같아. 그렇지만 다큐를 하길 잘한 것 같애. 정년이 없으니까. (웃음) 누가 투자 안 해도 할 수 있으니까, 내가 결심한 것은 아니지만, 난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홍: 좋아하는 감독이 있으신지.
 
김: 난 스필버그 감독 좋아해. (웃음) 내가 한국의 스필버그가 되려고 영화 시작했는데. 그것도 나이에 따라 많이 변하지만, 옛날에 영화 베스트 10 많이 뽑았어. 계속 달라지지만. 
 

오가와신스케
▲ 오가와 신스케 감독(1935-1992)


 
  그 질문 받는 게 오래 되기는 했는데, 다큐멘터리로 치면 난 역시 오가와 신스케 (小川紳介) 감독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 그 사람의 작품보다도 그 사람 돌아가시기 몇 달 전에 병원에서 그 감독을 30분 정도 만났는데, 그 때가 야마가타 갔을 때였지.  그 때 이미 암으로 투병 중이었고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던 때였는데, 아주 열정적으로 다큐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라고. 일본에 다큐를 만드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드는데 한국에서도 다큐멘터리를 한다고 하니 너무 반갑다, 고맙다, 상계동 올림픽도 봤다, 이런 이야기를 간호원이 말릴 때까지 하더라고. 거의 혼자서 떠들었어.(웃음) 나는 그 때 신스케 감독의 작품을 보기 전이고 물어볼 것도 거의 없었지만. 
  나중에 보니, 나리타공항 만들 때 농민 투쟁에 대한 7부작(<산리츠카 7부작>(<三里塚」シリーズ七作>))이 있어. 그 작품은 완전히 액티비스트의 입장에서 찍었지만, 관찰자적 입장에서 매우 차갑게 찍어냈더라. 나중에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나리타 투쟁 끝나고 농민들이 대토를 받아서 집단 이주를 하게 되었는데 그 때 오가와 감독도 5년 이상 같이 있었어. 자기도 완전히 농민으로 동화된 거지.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당신은 영화나 하라고, 농사에 대해서 뭘 아냐고 그런 이야기를 농담처럼 했대. 그 말에 자극을 받아서 영화 안 하고 3년 동안 농사만 지었다고 하더라. 그 뒤에 계속 농촌에서 영화를 만들고 야마가타 영화제를 주민들과 함께 시작했던 거지. 
  <천년을 새기는 해시계- 마기노 마을 이야기> (<1000年刻みの日時計- 牧野村物語>) 라는 작품이 있는데, 벼꽃이 피는 과정을 찍은 7시간짜리 영화야. (웃음) 벼꽃이 피는 것을 정말 계속 있는 그대로 찍은 거야. 투쟁적인 영화도 아니고, 벼꽃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꽃이라는 자각을 했는지 그런 전제 안에서 정말 집요하게 찍은 거지. (웃음) 그 집요함을 보고, 아 다큐멘터리 감독은 저래야 되나보다, 했지. 오가와 감독이 내가 다큐를 처음 접할 때 충격을 준 사람이라 그런지 그 사람을 아직도 좋아하고 있지. 그리고 주성치도 좋아해. (웃음)
 
홍: 주성치는 최고죠. (웃음)
 
김: 요새 감독들은 요새 극영화를 잘 안 보기 때문에 모르겠지만, 다큐멘터리 감독들 중에서는 좋아하는 사람 많지. <칠레 전투>라는 작품을 보았나? 
 
홍: 네, 봤어요.
 
김: 그 작품의 파트리시오 구스만(Patricio Guzman) 감독. 재작년에 전주 영화제에서 <빛을 향한 노스탤지어>(Nostaliga De La Luz)를 상영했지. 그 분도 결국 피노체트 정권 투쟁이 그 사람의 전부인데, 당시 희생자들의 유골을 찾는 영화야. 다큐멘터리 감독들 중 나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은 요리스 이벤스(Joris Ivens). 그 분은 네덜란드 감독인데 일생 동안 혁명의 현장을 찾아다녔지. 그리고 미나마타 현장을 평생 따라다닌 츠치모토 노리아키(土本典昭) 감독. 거기서 병에 걸린 사람들이 한 사람씩 죽어 가는데,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장례식에 다녀온 이야기들을 짧게라도 다루더라고. 그런 자세가 좋은 것 같아.
  다큐멘터리는 역시 삶과 깊게 연관되는 것 같애. 삶이 영화가 되는, 거기에 자기 삶도 녹아 있고. 그런 지점들이 극영화나 다른 장르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지점 아닌가. 물론 마이클 무어도 좋지. (웃음) 홍 감독은 누굴 좋아하는데?
 
홍: 저는 다큐멘터리를 많이 보지 않아서. 김동원 감독님 (웃음) 좋아하고요, 홍형숙 감독님도 좋아합니다, 개인적으로. 그런데 외국 작품을 많이 보지 않아서 아는 게 별로 없네요.
 
김: 인디다큐가 예전에는 외국 감독들을 한 사람씩 소개하고 그랬는데, 최근에는 예산 문제 때문에 못하고 있지. 좀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는 것 같아. 확실히 영화제에서, 특히 다큐멘터리 영화제는 세미나 같은 아카데믹한 분위기가 중요한 것 같거든. 다큐멘터리에도 이제는 상업주의 바람이 많이 불고 있지만, 그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지만, 역시 다큐멘터리가 진지한 엄숙주의에만 머물러 있으면 시대의 조류에 역행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아예 포기해버리면 그것은 정말 본질을 놓치게 되는 것 같고. 그런 다큐멘터리에서 옛날 감독들이 어떻게 시작했고, 어떻게 활동했고… 이런 것들이 힘을 줄 거라고 생각해. 
  우리 때는 맨날 남미 감독들이 자기 피 팔아서 필름 사가지고 찍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웃음) 그 때는 목숨 걸고 찍어야 되는 70년대 칠레나 아프리카… 검열제 놓고 싸우고 표현의 자유와도 부딪혀야 하는 게 많았어. 그럼에도 명맥을 이어나갔단 말야. 요리스 이벤스(Joris Ivens) 같은 경우는 네덜란드에서 추방당하고 자기 고향에 못 가고… 내가 그런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던 걸까? (웃음) 오가와 신스케 감독의 스승 격인 가메이 후미오(亀井文夫) 감독은 좌익으로 태평양 전쟁에 반대했는데, 태평양 전쟁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라는 명령을 받아서 차출되었는데, (<싸우는 군인들>(戰ふ兵隊)에서) 교묘한 방법으로 반전 메시지를 담았지만 결국 들켜서 감옥가고. 그런 이야기들이 재미있잖아? (웃음) 영화 자체보다 감독의 인생 역경이 시사해주는 바들이 컸지. 
  요새도 중국 같은 경우는 그런 것들이 꽤 많다 그래. 우리나라도 사실 부딪히려면 재미있는 일을 많이 벌일 수는 있을 것 같아. 
 
홍: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김: <강,원래> 같은 경우도 약간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그런 몸짓이지. 강정 같은 경우도 그렇고. 작품 자체보다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이나 아이디어들이 더 울림을 주는. 물론 잘 만들어야 하지만. (웃음)
 
홍: 요새 작품은 안 만드시나요.(웃음)
 
김: 안 만드는 것은 아니지. 좀 게으른 것은 있지만. 지금 학교에 있으니까, 다큐멘터리는 현장에 가야 하는데 시간이 안 맞아서 못하는 것도 있고. 지금은 우리 학교 20주년 기념 다큐를 만들고 있는데, 해외 다큐 제작 의뢰도 받고 있고… 그런 딴 짓들이 계속 들어오고 있어. 그렇지만 여전히 내 작품은 붙들고 있고. 내가 몇 년 전부터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한 셈이 되어서 (웃음) 이야기하기는 그렇지만, 내 프로젝트가 몇 개 있어…상계동 올림픽의 일종의 후편이 되겠지? 
  요새 자꾸 게으름을 피우고 있으니 학생들이 자기가 조감독할 테니까 빨리 시작하라고 압박을 많이 줘. (웃음)
 
 
잠시 카페 밖에서 담배를 피우며 쉬는 시간을 가졌다. SJM 사업장에 용역업체가 난입했다는 이야기로 우려스러운 마음을 나누던 중에, <호수길>의 정재훈 감독이 커피 원두를 사기 위해 카페에 들렀다. 김동원 감독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넨 정재훈 감독은 지금 일하고 있는 식당에 언제 한 번 오시라며 홍보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자본으로부터의 독립 - '독립 영화' 혹은 '독립 생계'  

 
김: 앞으로 혼자 작업을 계속할 건가?
 
홍: 잘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너무 혼란스러운 것 같아요. 요새 신다모 사람들도 만나면 맨날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어떻게 알바를 해서 먹고 살아갈 것인가. 일단 어떻게 살아가야 될 지를 잘 모르겠어요. 뭐를 먹고 살아가야 할지 이렇기도 하고, 그런 고민을 많이 하고 있어요. 
 
김: 그게, 어떻게 보면 운명이지. 다큐멘터리 하는 사람의 운명이고, 꼭 다큐멘터리만 그런 게 아니라, 한국만 그런 것도 아니고. 아까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만, 일단 자기가 무산 계급이 되어야 해. (웃음) 그리고 무산 계급인 것을 즐겨야지. 
  사실 옛날에 비하면 이런 저런 지원제도도 많이 생기고, 지원제도 초기에는 신청할 때 인건비도 못 써서 냈잖아. 감독들부터 쓰면 안 되는 것처럼 했었지. 많이 좋아진 것은 확실한데, 그러면 그럴수록 많은 경쟁을 거쳐야 하고, 여전히 계속 힘들 거야. 그런 기대를 갖기보다는, 내 삶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는 게 훨씬 빠른 방법이라 생각하는데. 그리고 아까 이야기했듯이 대상과의 동지의식을 갖기 위해서는 필요할 수도 있거든.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아. 그런 압박을 느끼면서 떳떳해지는 과정일 수 있고, 내가 만나야 할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일 수도 있는데… 
  요새는 무슨 아르바이트를 많이 하는지 모르지만, 우리 때는 결혼식부터 시작해서… 나는 산동네 있었으니까 터널 청소 이런 거 있잖아. (웃음) 밤새 하면 10만원 씩 벌었는데, 그런 건 안 빠지고 다 했지. 영화 쪽에서 알바를 하거나, 요새 미디액트에서 교육하는 것도 알바의 수단이 될 수 있겠지만…온갖 편집도 했지. (웃음) 우리 때는 국회의원 선거철 홍보 영상도 한나라당 아니면 다 하고. 
  요새 푸른영상에 정치인 영상제작 알바 하는 친구도 있어. 기업체 홍보도 하고. 중학교 1-3학년 영어교재를 DVD로 만들기도 하고. 홍 감독은 무슨 알바해?
 
홍: 저도 미디액트 교육도 하고, 길에서 액세서리 팔다가 접기도 했고…. (웃음) 별의별 일 하고 있죠.
 
김: 나는 예전에 택시 운전도 몇 달 했는데, 다시 하고 싶어. 재미있었던 기억이 나.
  글쎄… 결국은 낙관적이 되는 수밖에 없어. 굶어죽지 않겠지, 하는. (웃음) 푸른영상도 보면 몇 번의 재정적인 위기가 있었지만 그렇게 힘들었던 기억은 없어. 힘들 때마다 일감이 생긴다든지, 도와주는 사람이 나온다든지, 그랬던 것 같아. 물론, 푸른영상 같은 경우는 후원회원들이 조금 있지. 
  특별한 사정이 있을 수는 있지. 아이가 아프다든가 부모를 부양해야 한다든가 개인적인 사정이 있을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자기 몸 하나는 감당하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푸른영상에 차 모는 친구들도 많아. 나만 빼고. (웃음) 빚은 계속 지지만, 다른 일을 해도 빚은 지게 되니까. 버티는 것에 익숙해지고. 독립영화 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이 있는 것 같아.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까?  
 
홍: 제가 살고 있는 삶과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웃음)
 
김: 사실 다큐라서 힘든 건 아니잖아? 드라마 하는 사람도 똑같고. 결국은 자기 식대로 뚫고 나가게 되는 것 같아.  
 
홍: 제가 학교에 있다가 울산을 거쳐서 구미에 갔는데요. 구미에서 다시 서울에 돌아와 보니, 오랜 만에 본 대학 동기들 중에서 영화 계속 하려는 사람들은 연출부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영화가 정작 안 들어가니까 많이 힘들어하더라구요. 투자 실패하고 그러면 막노동하기도 하고. 나도 이제 뭘 해야 되지, 하면서 왔는데 여기서도 폐허를 본 것 같았어요. 사람들이 다들 영화를 그만 두고 다른 일을 하려고 하더라구요. 어떻게 살아야 되나.. 고민하면서 말이죠. 
 
김: 내가 처음 영화 시작할 때 연봉이 50만원이었어. 그 때는 무조건 일 년에 적어도 한국 영화 두 편 이상 만들어야 외화 수입 쿼터를 줬기 때문에 제작 기간이 짧은 편이었어. 1년에 서너 편 정도 할 수 있었는데 나는 1년에 한 편 정도 참여했지. 처음에 기록으로 들어갔는데, 이장호 감독 작품이었기 때문에 떼어먹히지는 않았어.(웃음) 떼어먹히는 경우도 되게 많잖아? 요새는 노조가 생겨서 좀 나아졌는지 모르겠지만. 
 
홍: 여전한 것 같아요, 제가 봤을 때는.
 
김: 영화판은 처음에도 그랬지만 여전히 사기 치려는 이들이 많아. 다큐하기를 잘한 거야. (웃음) 다큐판에서는 그래도 아직까지 사기꾼은 보지 못했으니까… 뭘 해 먹을 게 있어야지 (웃음) 
 
(스이: 결론이 이렇게 정리되면 안 되는데…(웃음))
 
김: 신진, 이라고 하는 말은 중견이 있다는 이야기잖아. 우리 판에 중견이 튼튼한 게 참 다행인 것 같아. 잘 버텨준 거지, 본인들이. 그러면서 신진들에게 희망과 모범을 보이고.  
 
 

최근의 경향: 대중성과 소재주의 - 새로운 기회 혹은 자본의 잠식  

 
김: 우리나라 다큐멘터리가 아직 프로듀싱 개념이나 마케팅 개념이 빈약한 게 문제가 되지. 요번에는 DMZ 영화제까지도 마케팅 개념을 들여오려고 하는데 한편으로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한편으로 걱정스러워지지. 극장용 다큐, 이런 개념이 생겼잖아. 예전에는 독립 다큐 중에서 예외적으로 대중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극장에 걸렸는데, 최근에는 처음부터 극장용 다큐를 겨냥하고 만들어지고 있으니까. 소재부터 < I am > 같은 것들이 기획되고. 대중성을 갖춰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해. 다만 스타일에서 대중성을 갖는 것은 좋지만, 소재에서부터 출발하면 안 되는 것 같아. 대중성을 갖추되, 타협하지 않을 부분들이 있는 거지. 
  영진위나 방통위 이런 데서 다큐멘터리에 대한 지원 액수가 커지고 대중성을 갖춘 다큐에 지원을 하는데, 그 대중성이라는 게 아마존을 간다든가, 뭔가 현실하고는 괴리가 있지. < I am > 이나 해태타이거즈 야구단 같은 유명한 등장인물들, 눈요기가 되는 공간들에 기대는 소재주의적인 경향들은, 현재 국면이 약간 이상한, 한편으로는 기회이면서 한편으로는 위기라고도 볼 수 있는 국면인 것 같은데,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 어떤 전략을 갖고 있어야 하는지, 그런 게 숙제가 되는 것 같아. 옛날에 하던 방법을 고수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좀더 젊은 친구들은 새로운 방법을 찾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고. 
  <두 개의 문> 같은 경우, 내가 '씨네 21'에서 상업주의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만, <두 개의 문>은 가장 중요한 시각을 잃지 않고 대중성을 동시에 노린 작품이지. 그건 어떻게 보면 아주 효과적인 전략이었다고 보여지지만, 거기서 내 이야기는 영화적으로는 그렇게 새로울 것이 없었다, 는 것이고. 다만 연분홍치마가 사실은 영화적 욕심보다 액티비스트적 정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만약 영화적으로 실패했다고 해도 선동성에서 성공했다면 성공한 거지. 암튼, 홍 감독 영화는 대중성과는 좀 거리가 멀지 (웃음)
 
홍: 저도 동의해요. (웃음) 상업영화 연출부에 들어간 대학 선배에게서 전화가 온 적이 있었어요. 만나서 술을 먹는데, 그런 이야기 많이 하잖아요, 시나리오를 몇 분 단위로 끊어서 분석을 해서 흥행성이 있느냐 없느냐 따진다는. 씬을 한 씬 한 씬으로 다 떼어놓고 일반 관객들에게 보여주면서 버릴 것을 찾고 이런 것들이 감당이 안 된다고 했어요. 
  상업성을 갖는다는 게 돈을 누가 주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필요하고 필요하지 않고를 떠나서 그 사람들이 만든 영화가 다 성공하지는 않는데, 그것을 보는 눈을 누가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해서 그런 권력을 갖게 되는지가 문제니까요. 결국 돈을 대는 사람들이 보는 권력을 갖게 되는 거죠. 
 
김: 학교에서도 영화학과에서 보면 상업영화를 가르치거든. 예술 영화한다고 하면 욕하면서 말린대.(웃음) 불과 10년 전만 해도 상업영화 흉내 내면 막 뭐라고 했거든. 홍상수 감독이 학생일 때만 해도 최소한 학교에 있을 때만은 내공을 기른다는 차원에서 예술 영화나 실험영화를 장려 했는데, 요새는 학교에서부터 그렇게 가르치니까. 
  극영화는 이제 자본부터가 CJ 같은 경우를 봐도 그렇지만 영화를 위한 자본이 아니잖아? 그렇게 넘어간 것 같아. 예외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홍상수나 김기덕은 좀 낫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지만 사실 전혀 투자할 자본이 없고 오히려 영화 만들다 더 어려워진 상황인 것 같아. 이창동이나 임권택 감독도 더 이상 자본 조달이 어려운 상황이고. 내 생각엔 극영화도 1억 미만으로 제작해서 승부를 걸 수밖에 없어. (웃음) 아니면 2-30억 짜리 영화를 할 수 밖에 없는데, 그렇게 되면 내 맘대로 할 수 없게 되는 게 너무 분명하니까. 옛날에는 그래도 명필름이 좀 가능성이 있었지만, 과연 영화에서 작품성과 흥행성을 동시에 갖기는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아. …역시 다큐하길 잘했어. (웃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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